루소, 뇌샤텔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다 문장 휴게실


  『에밀』의 내용에 대한 성직자들의 반감과 탄압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망명의 길에 오른 루소는 여러 해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루소의 마음으로는 고향 제네바에 돌아가 살고 싶었으나 제네바 공화국도 루소의 저술들을 단죄하며 금서 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제네바 영토를 밟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네바에 인접한 베른
주의 정부도 루소의 영토 내 체류를 허가하지 않았다. 루소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수소문한 끝에 뇌샤텔(Neuchâtel)의 호의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스위스 연방에 인접하지만 연방에 속하지 않고 자치령으로 있던 뇌샤텔 공국은 1707년 유산 상속의 형식으로 프로이센 영토로 귀속된 상태였다. 뇌샤텔의 총독 조지 키스(George Keith) 경이 루소의 사정을 알고 그를 영지에서 받아주기로 하였다. 키스 경은 스콧틀랜드 출신인데 영국에서 프로이센으로 망명하여 프리드리히 2세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뇌샤텔 총독으로 부임해 있던 그는 자유사상가로서 루소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과 같이 루소의 도도한 편지를 받고 오히려 그의 진솔함에 방점을 찍었다.

“... 저는 존경하는 왕이 별로 없고 군주정치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떠돌아다니다가 머물게 되는 곳에 해를 끼치지 않는 집시의 규범을 따르겠습니다.... ”

키스 총독은 군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루소의 체류 허락을 재가 받기 위해 자초지종을 보고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루소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시민권을 부여하고 경제적 도움이 되도록 지원금까지 보냈다. 계몽군주로 꼽히는 그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있었다.

“불행에 빠진 그 사람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오. 그 사람이 좋다고 믿는 견해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죄 값을 치르고 있지 않소?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지만 않다면 조용한 곳에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하나 지어주고 싶소. 우리의 먼 조상이 살았다고 그가 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오. 솔직히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은 유한과 무한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오. 물론, 우리가 너무 빠져 있는 사치, 너무 편한 생활과 쾌락은 삶의 본질이 아니며 지금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삶을 포기할 이유가 뭐요? 나는 요즘 이율배반적 이론을 전개하는 여러 철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소. ...”

그렇게 하여 루소는 프로이센 령에서 통치자들의 보호 속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호젓한 집까지 얻었다. 그를 평소 존경하고 있던 부아 드 라 투르(Boy de la Tour) 부인이 조용한 산골마을 모티에의 빈 집을 내 준 것이다. 떠나 온 몽모랑시의 환경이 부럽지 않게 이곳도 숲이 우거진 언덕에 집이 있고, 둘러싼 계곡에는 온갖 식물이 자라며 풀밭을 이루고 있었다. 루소는 산책을 즐겼고, 식물을 관찰하며 채집하기를 즐겼다.

이 무렵 루소는 가급적 글쓰는 일을 줄이고 조용히 쉬면서 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 영감이 온전히 무위도식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루소는 모티에의 트라베르 계곡에서 지내는 동안 틈틈이 음악에 관한 글들을 정리하였다. 전부터 조금씩 써 오던 것을 손질하고 모아서『음악 사전』이라는 책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던 코르시카 섬 주민들을 위하여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뷔타포코라는 코르시카 장교의 부탁을 받고 독립된 공화국을 전제로 그에 걸맞은 법제도의 골격을 작성한 것이다.  

또한, 신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왕성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던 루소는 조용히 침묵하지 못했다. 이국의 외딴 곳에 머물면서도 그를 탄압하는 프랑스 성직자 집단 및 제네바 지도자들과 글로 논쟁을 벌였다. 자신을 비난했던 파리 대주교의 교서에 대한 반박의 글을 써서 발표했다. 제네바의 한 지방 총독으로서 루소의 단죄에 앞장섰던 로베르 트롱생이『나라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글로 제네바 당국의 조치가 정당함을 공표하자 루소는『산에서 쓰는 편지 Lettres écrities à la montagne』라는 글을 써서 트롱생을 공격하며 제네바 의회의 조치가 공화국의 전통과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천명하였다. 이 논쟁서에서 루소는 볼테르에 관해 조금 언급했는데 그것이 봍테르의 심기를 건드렸다. 볼테르는 익명으로 짧지만 신랄하고 악의에 찬 글 『시민들이 느끼는 것 sentiments des citoyens』을 써서 팜플렛으로 발표하였다. 이 글에는 루소를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그리고 성직자를 모독하는 ‘바보 중상 모략가’라고 비꼬며 저주하는 표현이 들어 있고, 루소가 불쌍한 여자 하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 다 시키며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 문 앞에 버리도록 하였다는 등 도덕과 종교의 정서를 빌어 그를 비난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누가 쓴 글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루소는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려는 이 글에 서둘러 답변서를 써서 해명하였으나 사회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를 신앙심 없고 무모하며 해괴한 사람으로 이야기를 퍼트리는 풍문이 생겨났다.  

함께 계몽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서 사회변화의 흐름을 이끌며 큰 힘을 보탰던 루소와 볼테르의 악연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을 많이 지니면서도 어울리기 힘든 차이점들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출신배경과 성향과 이상이 서로 달랐다. 볼테르가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면 루소는 제네바 소시민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굴곡진 성장기를 보냈다. 볼테르는 문화를 즐기며 세련된 행동을 추구한 반면에 루소는 문화와 사회제도의 모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연적 삶을 애호하고 격식과 위선을 싫어하였다. 볼테르가 구제도의 모순을 극복하되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며 계몽적 엘리트가 주도하는 질서를 추구하였다면 루소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체하며 만민이 평등한 사회로서 전혀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볼테르의 담론에 귀를 기울였고, 혁명주의자들은 루소의 사상에 귀를 많이 기울였다.

아무튼 외롭게 여러 사람들과 동시다발로 논쟁을 벌여야 했던 루소는 많은 어려움에 처했다. 건강 때문에 인공 배설기를 몸에 차고 다녀야 했고, 그런 것을 편하게 처리하려고 독특한 아르메니아식 옷차림을 하고 다니던 루소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인상을 주며 괴상한 인물로 비취어 경계의 시선을 받았다. 시골 신부나 목사들에게는 잘 타일러 종교적으로 순화시키고 개종시켜야 할 악동으로 취급당하였다. 모티에의 조용한 집이 더 이상 조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루소를 존경하거나 돕기 위해 찾는 사람과 그를 비난하거나 개종시키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뒤섞여 번잡해졌고, 나들이 할 때 사람들을 만나면 불편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하여 루소는 모티에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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