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영감 ... 지성이 분출하다 문장 휴게실


   루소는 사교적 성격이 아니어서 스스로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마당발’처럼 적극적으로 사귀지는 못했다. 그래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 중에는 시대의 지성을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콩디약,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등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디드로와는 무척 친한 관계가 되었다. 서로 마음을 털어 놓고 고민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친한 벗 디드로가 사건을 하나 일으켰다. [눈 먼 사람들에 관한 편지]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다분히 무신론적인 논조를 담고 있었다. 가톨릭 권력이 귀족을 능가할 만큼 사회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던 당시에 그런 ‘불경스러운’ 글을 발표하는 일은 무사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논란 끝에 결국 디드로는 체포되어 파리 교외의 뱅센느 감옥에 구금되었다. 루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면회가 허락되는 날을 기다려 디드로를 보러갔다. 생각보다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루소는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8km씩이나 되는 길을 걸어서 벗을 만나러 뱅센느로 찾아갔다. 1749년 10월 어느 날에도 루소는 디드로를 만나러 뱅센느로 향하고 있었다. 손에는 심심풀이로 [메르퀴르 드 프랑스]라는 잡지를 들고 있었다. 단조로운 발길을 달래려고 잡지를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눈길을 사로잡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디종(Dijon) 학술원에서 논문을 현상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제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인간의 풍속을 순화시키는데 기여했는가?”였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 루소는 강한 충동과 영감에 휩싸였다. 그냥 걸을 수가 없었다. 몸과 마음을 가누기 위해 길가 나무 아래 앉아서 30분 정도 쉬어야 했다. 훗날 말제르브에게 쓴 편지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불현 듯 떠오르는 어떤 영감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때 제 안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그런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수천 개의 등불이 눈부시게 내 정신을 밝혀주는 느낌이었고, 생생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맹렬한 기세로 밀려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는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고, 가슴은 너무 두근거려서 숨이 막할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숨을 가눌 수가 없어서 시골 길에 늘어선 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 밑에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렇게 30분가량 심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가 몸을 추슬러보니 저고리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오, 선생님! 제가 그 나무 아래서 느꼈던 것의 1/4만 옮겨 썼더라도 정말 명쾌하게 사회 질서의 모순을 낱낱이 밝히고, 인간이 본성적으로는 선한데 단지 우리의 제도 때문에 악하게 된다는 것을 정말 단순명료하게 증명할 수 있었을 겁니다.”
  
   루소는 그 때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즉석에서 적었다. ‘파브리키우스의 변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휘갈겨 썼다. 그것을 들고 뱅센느에 가서 디드로를 만나자 루소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자기가 급히 거칠게 쓴 글을 보여주었다. 디드로는 그것을 읽어보더니  생각들을 좀 더 발전시켜서 하나의 논문으로 완성해 보라고 권했다. 집에 돌아 온 루소는 며칠간 잠을 설치며 글을 썼다. 논문이 완성되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인간의 영혼을 순화시키기보다 타락시켜 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디종 학술원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일지 모른다. 현상 공모된 논문 주제에 비추어 볼 때 통념적으로는 학문과 예술이 인간성을 고양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삼고, 다만 왜 어떻게 기여하는 지에 관해 설득력 있는 가설이나 증명을 기대하기 쉽다. 그런데 루소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고 나름대로 논거를 제시하며 열심히 설파하였다. 그런 내용의 논문을 있는 그대로 디종 학술원에 보냈다. 그리고 나서 1750년 여름에 루소는 논문 생각을 까마득히 잊은 채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디종에서 낭보가 날라 왔다. 그의 논문이 당선작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루소는 크게 고무되었다. 사실 자신의 열정에 따라 글을 썼고, 논문이 완성되었기에 응모했지만, 꼭 당선되리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영예로웠다. 38살의 루소는 뒤늦게 행운을 맞았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잠재력의 가능성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벗을 만나러 시골 길을 걷고 있던 그에게 느닷없이 찾아 온 영감이 스스로 지니고 있던 지성적 능력을 깨닫게 한 것이다.  

   루소의 첫 논문 [학문과 예술에 관한 담론]은 루소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논리 체계가 좀 허술한 글로서 감성에 많이 치우쳤다. 그러나 글의 문체는 오히려 힘이 있었고 그 내용에 담긴 비판정신이 매우 날카로웠다. 사회적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상을 받고 나서 몇 달 뒤에 논문은 곧바로 작은 책자로서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필자의 논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비판적인 사람들로 나뉘어 뜨거운 토론이 전개되었다. 찬성론자 못지않게 반대론자들도 많았다. 특히 인간의 이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인류사회의 진보에 희망을 걸던 계몽주의자들에게 매우 복잡한 화두가 되었다. 볼테르 같은 사람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디드로 같은 사람들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후일에는 결국 서로의 차이를 크게 느끼게 되었다. 사실 루소의 사상에는 계몽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근본적 문제의식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계몽주의가 민중에게 세상 바라보는 눈을 깨우쳐 주었다면 루소의 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이 어떻게 잘 못 되었는지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변혁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루소의 첫 논문으로서 세상에 발표된 학문-예술론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뜨거운 논쟁의 무대를 마련하였다. 심지어 폴란드의 왕 스타니슬라스 레진스키까지 직접 이 논쟁에 참여하여 루소의 글에 대한 반박 논문을 썼다. 루소는 그가 반박하는 부분에 대하여 다시 논박하는 글을 썼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었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개인도 얼마든지 군주를 상대로 진리를 옹호할 수 있다. 이는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좋은 기회였다.”

   루소는 첫 논문의 성공으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음악교사, 악보 필경사, 비서, 조수, 무명 문필가로서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루소가 이제는 파리의 사교계 그리고 서양의 지성계에 새로운 별로 뜬 것이다. 너무 유명해져서 귀찮은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 거절을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꾸 찾아 왔다. 집에서 한가하게 쉬거나 차분히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사교적 성격이 아닌 루소에게 그런 상황은 매우 난감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신경과민 현상이 나타나고 건강이 나빠질 정도였다. 그렇게 그가 누리는 유명세는 그 화려함에 비해 실속이 별로 없었다. 경제적 수입이 시원찮은 반면에 시간을 너무 빼앗겨서 글이나 악보를 써서 수입을 늘리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형편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루소의 첫 명성에도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렇게 루소는 첫 논문 [학문과 예술에 관한 담론]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개인적 성공의 첫 걸음이자 인류의 지성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건은 매우 우연히 일어난 일 같지만 사실은 내재하고 있던 조건이 현실의 구체적 동기를 부여받아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미 준비된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그 동안 많은 독서와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성이 적절한 계기를 통해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본 것은 단지 한 순간의 영감에서만 비롯하는 것이 아님은 틀림없다. 이미 그는 일찍부터 기존 사회에 모순이 누적되어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을 내면적으로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학문이나 예술 또는 그 밖의 많은 제도와 관습 또는 규칙들이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순수한 가치를 말살하며 위선으로 가득한 허상만을 낳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본격적으로 논술할 기회가 없어서 잠재해 있다가 이제야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점은 첫 논문에 뒤이어 발표할 여러 글에서도 상당히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사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는 기성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변혁의 정신이 깊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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